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저우언라이]] == [[파일:external/res.news.ifeng.com/4e5dc56186c6f0bc8e4ae35e5bade2b1.jpg]][* 황푸 군관 학교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저우언라이(오른쪽).]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 - 마오쩌둥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 군관 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 주임이었다. 정치 주임은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 둘은 매일 같이 아침을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 보통 달걀을 풀어 넣은 콩국과 압맥빵을 같이 먹었는데, 저우언라이는 이후로도 거의 평생 이 식단으로 아침식사를 하게 된다.]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 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 군관 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학교 내에 공산당 세포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이가 [[린뱌오]]로, 장제스의 제자였던 린뱌오는 제2차 국공 내전에 국민당군에게 만주 방면에서 참패(요심 전역)를 안겨주었고, 이 한판으로 전세는 완전히 공산당 쪽으로 기울었다.]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두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상대방의 음모라고 주장.]인데 저우언라이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장제스를 배신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공산주의자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군에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이는 실수였다. 다만 이 시기의 기록이 부정확해서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 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그러다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이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